'예산은 늘었는데 삶은 그대로'라는 말, 낯설지 않으실 겁니다. 정부는 해마다 장애인 정책 예산을 확대했다고 발표하지만, 정작 지역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당사자들의 체감은 딴판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통계와 현장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한국 장애인의 지역사회 자립이 왜 이렇게 더딘지 구조적으로 짚어보고, 실현 가능한 해법을 함께 고민해보려 합니다.
왜 '지역사회 자립'이 장애인 정책의 핵심 화두가 되었나
장애인 복지 정책의 오랜 패러다임은 '시설 보호'였습니다. 갈 곳 없는 장애인을 시설에 수용하고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공하는 것을 복지의 완성으로 여겼던 시기가 길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장애인을 지역사회로부터 분리시키고, 스스로 삶을 설계할 권리를 박탈한다는 비판에 부딪혔습니다. 이에 정부는 2021년 '탈시설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지원 로드맵'을 발표하며 2025년부터 매년 740여 명의 장애인에 대해 지역사회 정착을 지원하고 2041년경 지역사회 전환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을 제시했습니다. 방향 자체는 분명 옳습니다. 문제는 그 방향을 뒷받침할 재정과 인프라가 정책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현실 진단 1: '늘었다는 예산', 왜 삶은 그대로인가
2026년 정부는 장애인 정책에 총 9대 분야, 전년 대비 9% 늘어난 7조 원을 투입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숫자만 보면 상당한 진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산의 '구성'을 뜯어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한 장애인단체 분석에 따르면 2026년도 장애인 예산은 정부 전체 예산의 겨우 1% 수준이며, 특히 지역사회 전환을 지탱할 핵심 항목의 증가폭은 미미합니다. 장애인 개인예산제는 시범사업 단계임을 감안해도 전체 장애인 예산의 0.03%에 불과한 수준으로 편성되었고, 반면 장애인 거주시설 운영 지원 예산은 오히려 매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상징적인 모순입니다. 정부는 '탈시설'을 국정 방향으로 내세우면서도, 실제 예산은 여전히 시설 중심 지원에 더 두텁게 배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장에서 만난 한 장애인단체 관계자는 주거, 돌봄, 소득이 동시에 뒷받침되어야 지역사회 정착이 가능한데 예산은 여전히 분절적으로 편성돼 있어 정책 방향과 재정 투입 사이의 간극이 크다고 지적합니다. 중증 지체장애인 김 모 씨의 사례는 이 간극을 체감케 합니다. 장애인연금이 인상되었다는 소식에 잠시 안도했지만, 실제 인상액은 월 몇 만 원 수준에 그쳤고, 월세와 관리비, 의료비를 내고 나면 남는 돈이 거의 없다는 것이 그의 현실입니다.
현실 진단 2: 활동지원사 부족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
지역사회 자립생활의 전제조건은 안정적인 돌봄 인프라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장애인활동지원제도는 '제도는 있으나 서비스는 없는' 역설적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한 대학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이를 두고 활동지원사 1인당 근무 여건과 임금, 사회적 인식 문제가 이미 만성화되어 있으며 특히 비수도권이나 야간·주말 시간대에는 사실상 서비스가 마비되는 상태에 이르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한 어머니는 활동지원 예산 확대 소식은 반가웠지만 실제로 서비스를 제공할 활동지원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아, 서류상으로는 지원을 받는다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집에서 혼자 돌봐야 하는 날이 더 많다고 토로합니다.
이 문제는 지역별 편차로 갈수록 심화됩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200명 이상의 활동지원사를 보유한 기관의 비율이 대도시는 52.8%, 중소도시는 50%에 달하지만 농어촌 및 산간 지역은 30명 미만인 기관이 43.3%를 차지합니다. 즉, 같은 제도 아래에서도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받을 수 있는 돌봄의 양과 질이 완전히 달라지는 셈입니다. 소규모 기관은 운영비 한계로 활동지원사의 처우를 개선하기 어렵고, 이는 다시 인력 이탈과 매칭 실패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습니다.
현실 진단 3: 탈시설 로드맵과 지역 인프라의 괴리
정책은 '지역사회로'를 외치지만, 정작 지역사회에는 이들을 받아들일 물리적 기반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립생활주택이나 체험홈 같은 전환 주거는 여전히 수요 대비 공급이 턱없이 부족하고, 최중증 장애인을 위한 지원주거 모델도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실제로 돌봄 요구가 높은 장애인의 경우 해외에서는 지역사회 내 주거·보건·복지서비스가 통합적으로 제공되는 지원주거 모델을 활용하는 반면, 한국은 거주시설 외에 뚜렷한 대안 없이 오직 활동지원제도만으로 대응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주거뿐 아니라 소득 보장 체계도 자립을 뒷받침하기엔 역부족입니다. 정부가 2026년 지역사회 자립지원 시범사업을 전국 17개 광역지자체로 확대했다는 점은 고무적이지만, 이런 사업들이 실제로 '탈시설 이후의 삶'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려면 주거·돌봄·소득·고용이 하나의 패키지로 맞물려야 합니다. 지금처럼 사업별로 따로 설계되고 따로 예산이 편성되는 구조에서는, 장애인 당사자가 여러 창구를 전전하며 스스로 복지 체계를 조립해야 하는 부담을 떠안게 됩니다.
해결 방안 1: 예산 편성 방식을 '시설'에서 '사람' 중심으로 전환
가장 근본적인 처방은 예산 편성의 논리 자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시설 운영비를 자동으로 증액하는 관성적 편성 방식에서 벗어나, 지역사회 정착 예산에 우선순위를 두는 방향으로 재정 구조를 재설계해야 합니다. 개인예산제처럼 당사자가 자신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제도는 방향은 옳지만, 시범사업 규모로는 실질적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본사업 전환을 앞당기고 예산 규모를 실질화하는 것이 우선 과제입니다.
해결 방안 2: 돌봄 노동의 가치를 재정립하고 지역 격차를 해소
활동지원사 부족 문제는 단순한 구인난이 아니라 돌봄 노동의 가치를 사회가 어떻게 인정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임금 수준과 근무 여건을 개선하지 않고서는 인력난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농어촌·산간 지역처럼 기관 규모가 작아 구조적으로 불리한 곳에는 별도의 운영비 지원이나 광역 단위 인력 풀 운영 같은 보완책이 필요합니다. 돌봄을 개인과 가족의 몫으로 떠넘기지 않고 공동체와 국가가 함께 책임지는 방향으로 제도의 축을 옮겨야 지역 간 서비스 격차도 줄어들 것입니다.
해결 방안 3: 주거·돌봄·소득·고용을 통합 설계
지역사회 자립은 주거 하나만 해결한다고 완성되지 않습니다. 자립생활주택 같은 전환 주거의 공급을 늘리는 동시에, 그 주거에 정착한 이후의 돌봄 서비스와 소득 보장, 고용 연계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설계해야 진짜 '자립'이 가능해집니다. 지금처럼 부처별, 사업별로 나뉜 지원을 당사자가 일일이 찾아다니며 신청해야 하는 구조는 그 자체로 자립의 장벽입니다. 지자체 단위의 통합 사례관리 체계를 강화하고, 자립 이후 일정 기간 동안 밀착 지원하는 사후관리 체계를 함께 갖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방향은 맞지만, 속도와 밀도가 부족
한국의 장애인 정책은 '수용에서 자립으로', '시혜에서 권리로'라는 방향 전환에는 이미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문제는 그 방향을 현실로 만들 재정과 인프라, 인력이 정책 구호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산 총액의 증가만을 성과로 내세우기보다, 그 예산이 실제로 당사자의 삶을 바꾸는 항목에 얼마나 두텁게 쓰이고 있는지를 따져보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진단입니다. 지역사회 자립은 슬로건이 아니라, 예산의 우선순위와 돌봄 노동에 대한 사회적 합의, 그리고 촘촘한 지역 인프라가 맞물릴 때 비로소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도움 글 출처]
-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2026년도 장애인 예산, 정부 예산의 '겨우 1%'"
-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2026년 장애인 예산' 생존에서 자립으로 가는 길, 재정은 충분한가"
- 월간비즈, "정부, 2026 장애인정책 발표…자립·돌봄·이동권 강화"
- 보건복지부, "탈시설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지원 로드맵"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 미디어생활, "[주간칼럼] 장애인활동지원사 부족: 돌봄 위기 그림자와 정책 대전환 필요성"
-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양적 성장 이룬 '장애인활동지원제도' 제도적 구멍 숭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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