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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

재벌 중심 성장모델이 남긴 복지 공백 - 기업복지의 그림자

by 구름따라 방랑자 2026. 9. 13.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과 중소기업에 다니는 사람은 같은 월급명세서를 받아도 실제 손에 쥐는 것이 다릅니다. 사택, 학자금, 의료비 지원, 사내근로복지기금까지 더하면 격차는 임금표에 적힌 숫자보다 훨씬 벌어집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 격차가 어쩌다 생긴 우연이 아니라, 재벌 중심 성장모델이 설계 단계에서부터 만들어낸 구조적 결과라는 점을 짚어보려 합니다.

 

1. 기업복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

기업복지란 법으로 정해진 4대 보험이나 퇴직금 같은 법정복지를 넘어, 기업이 자발적으로 근로자에게 제공하는 각종 급여성 혜택을 말합니다. 사택 및 주택자금 대출, 자녀 학자금, 의료비 지원, 경조사비, 선택적복지제도(카페테리아 플랜), 그리고 사내근로복지기금을 통한 각종 지원이 대표적입니다. 문제는 이런 혜택이 '기업이 여유가 있으면 주는 보너스'가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는 사실상 사회보장의 일부를 대신하는 기능을 해왔다는 점입니다. 주거, 자녀 교육, 의료라는 삶의 핵심 위험을 국가의 사회보장제도가 아니라 회사가 떠안는 구조가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온 것입니다.

 

2. 숫자로 확인하는 격차: 300인 이상과 300인 미만의 거리

고용노동부의 기업체 노동비용 조사 결과를 보면 이 격차는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명확한 수치로 드러납니다. 300인 이상 대기업은 근로자 1인당 월평균 임금과 복리후생비로 760만 원 이상을 지출하는 반면, 300인 미만 기업은 483만 원 수준에 그칩니다. 1,000인 이상 기업(842만 원)과 30인 미만 기업(456만 원)을 비교하면 격차는 거의 두 배에 이릅니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방향입니다. 300인 미만 기업의 노동비용이 300인 이상 기업의 몇 퍼센트 수준인지를 나타내는 비율은 2013년 63.5%에서 등락을 거듭하다 최근 다시 63%대까지 떨어졌습니다. 즉 격차가 좁혀지기는커녕 다시 벌어지는 국면에 들어선 것입니다. 채용 시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졸 신입사원의 초임 격차뿐 아니라, 복리후생비 지출에서는 중소기업이 대기업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조사 결과가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3. 기업복지는 어떻게 지금의 모습이 되었나 - 발전국가의 유산

이 구조를 이해하려면 시계를 수출주도 성장기로 되돌려야 합니다. 지난 포스트에서 다룬 것처럼, 박정희 정부 시기의 성장 전략은 임금 억제와 노동 통제를 축으로 삼았고, 국가는 그 대가로 복지 확대를 미루는 대신 재벌 대기업이 자체적으로 종업원을 관리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저임금 정책으로 억눌린 보상 욕구를, 국가 복지가 아니라 사택과 학자금이라는 사적 급여로 흡수하게 한 것입니다. 그 결과 기업복지는 처음부터 재벌 대기업 정규직을 중심으로 설계되었고, 하청업체나 중소기업, 비정규직 노동자는 애초에 설계 대상에서 빠져 있었습니다. 민주화 이후 노동조합이 성장하면서도 이 구조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대기업 노조는 임금 인상뿐 아니라 기업복지 확대를 단체교섭의 핵심 의제로 삼았고, 이는 결과적으로 국가 복지 확대 요구보다 기업 단위의 처우 개선에 힘을 쏟는 방향으로 굳어졌습니다.

 

4. 보이지 않는 손: 사내근로복지기금과 조세지출

기업복지가 순수하게 기업의 자체 재원으로만 운영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대표적인 제도가 사내근로복지기금입니다. 기업이 이 기금에 출연하는 금액은 법인세법과 소득세법상 전액 필요경비로 인정되어 손금 처리가 가능합니다. 제3자가 기금에 재산을 출연하면 증여세가 면제되고, 상속의 경우에도 비과세 대상이 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근로자 쪽입니다. 근로자가 기금을 통해 받는 혜택은 근로소득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에 소득세는 물론 사회보험료 부담에서도 제외됩니다. 다시 말해 기업복지는 순수한 민간 영역의 산물이 아니라, 국가가 세제 혜택이라는 형태로 비용의 상당 부분을 분담하고 있는 '조세지출형 복지'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이 세제 혜택이 사내근로복지기금을 설치할 여력이 있는 대기업, 그중에서도 재벌 계열사에 압도적으로 집중된다는 점입니다. 최근 대기업이 통합고용세액공제 대상에서 제외되는 등 일부 세제 혜택이 축소되는 흐름도 있었지만, 이는 전체 조세지출 규모에서 대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았기 때문일 뿐, 사내근로복지기금을 둘러싼 근본적인 세제 구조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5. '그림자 복지국가'라는 시각 - 세 가지 작동 원리

이 글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그림자 복지국가'라는 틀로 설명해보려 합니다. 국가가 직접 나서서 만든 복지제도의 그늘 뒤편에서, 기업복지가 마치 또 하나의 복지국가처럼 작동하면서도 그 수혜 범위와 재원조달 방식은 전혀 보편적이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 구조는 크게 세 가지 원리로 작동합니다.

5-1. 비용의 사회화, 혜택의 사유화

앞서 살펴본 것처럼 기업복지의 재원 중 상당 부분은 세제 혜택이라는 형태로 국가, 즉 사회 전체가 분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혜택은 재벌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한정된 집단에만 사유화되어 돌아갑니다. 비용은 사회화되어 있는데 수혜는 사유화되어 있는 비대칭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중소기업 노동자나 비정규직 노동자는 이 조세지출의 재원 마련에는 똑같이 기여하면서도, 정작 그 혜택으로부터는 체계적으로 배제됩니다.

5-2. 이중구조의 고착: 응집된 외부자성과 분절적 보호

2025년 발표된 이승윤·박성준의 연구는 이 구조를 '외재적 비용전가'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한국의 대기업은 수출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고용과 복지의 비용을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체계적으로 전가하는 구조를 발전시켜왔다는 것입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고용 불안정과 사회보장 배제가 함께 나타나는 '응집된 외부자성'을 겪는 반면, 대기업 노동자들은 고용형태상 불안정 요소가 있더라도 사회보장 측면에서는 두텁게 보호받는 '분절적 보호'를 누립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을 논의하는 정부 위원회에서도 우리 노동시장이 법제와 사회안전망의 보호를 받는 12퍼센트의 대기업·정규직 부문과, 그러한 보호에서 배제된 88퍼센트의 부문으로 나뉘어 있다는 진단이 나온 바 있습니다. 기업복지는 이 12퍼센트와 88퍼센트의 격차를 임금 격차보다 더 크게 벌리는 증폭 장치로 기능합니다.

5-3. 연대의 붕괴: 왜 보편적 복지 확산의 동력이 약해지는가

세 번째 원리가 가장 정치적입니다. 기업복지로 이미 상당한 수준의 보호를 확보한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 입장에서는, 세율 인상이나 사회보험료 확대를 감수하면서까지 국가 단위의 보편적 복지를 확대해야 할 절박함이 상대적으로 작아집니다. 반대로 그 확대를 가장 필요로 하는 중소기업·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조직화된 발언권이 약해 정책 결정 테이블에서 목소리를 내기 어렵습니다. 결과적으로 노동 내부에서 보편적 복지국가 건설에 동력을 실어줄 계급연대가 형성되기 어려운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지난 포스트에서 다룬, 민주화 이후에도 완전한 복지국가 전환이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지목했던 노동-중산층 계급연대의 실패는, 이런 식으로 기업복지라는 구체적인 제도를 통해 매일 재생산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6. 그렇다면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이 구조를 단번에 해체할 수 있는 묘책은 없습니다. 다만 세 가지 방향의 논의는 가능합니다. 첫째, 사내근로복지기금을 비롯한 기업복지 관련 세제 혜택의 형평성을 정기적으로 심사하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조세지출 예산서에 기업복지 관련 항목의 수혜 기업 규모별 분포를 공개하는 것만으로도 논의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원청과 하청 간 상생기금이나 산업별 공동 근로복지기금처럼, 기업 단위를 넘어서는 복지 재원 공유 모델을 확산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 결국 이 문제는 저희가 이 블로그에서 계속 강조해온 삼축 프레임, 즉 세입·사회보험료·재정지출 구조의 문제로 되돌아갑니다. 기업복지에 쏠린 조세지출을 재구성해 그 재원 일부를 보편적 사회보장의 세입 기반으로 전환하는 것이야말로, 재벌 중심 성장모델이 남긴 복지 공백을 메우는 실질적인 첫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재벌 중심 성장모델은 압축성장이라는 성과와 함께, 기업복지라는 이름의 그림자 복지국가를 남겼습니다. 이 그림자는 누군가에게는 두터운 보호막이지만, 그 보호막을 지탱하는 비용은 그 보호막 밖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부담하고 있습니다. 복지국가 논의가 급여 수준이나 예산 규모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런 숨은 재원조달 구조까지 시야에 넣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참고자료]

  • 고용노동부, 「기업체 노동비용 조사」(300인 이상·미만 기업 간 노동비용 및 복리후생비 격차 통계)
  • 이승윤·박성준(2025), 「대기업의 '외재적 비용전가'와 한국 발전주의 복지국가의 재해석」 - 성장복지모델, 노동시장 이중구조, 응집된 외부자성/분절적 보호 개념
  •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 관련 정부 위원회 논의 자료(12%·88% 노동시장 이중구조 진단)
  • 사내근로복지기금 관련 세제 혜택 해설 자료(법인세법·소득세법상 손금산입, 비과세 규정)
  • 통합고용세액공제 관련 조세지출 규모 및 대기업 수혜 비중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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