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논쟁은 오랫동안 "얼마나 쓸 것인가"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질문의 무게중심이 조용히 옮겨가고 있습니다. 총량이 아니라 배분, 즉 "같은 돈을 누구에게 어떤 원칙으로 줄 것인가"가 실제 정책의 쟁점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2026년 9월 발표된 기초연금 개편안이 그 상징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저성장이 복지국가의 분배 원칙에 어떤 압력을 가하는지, 그리고 그 압력에 굴복하는 것이 과연 정답인지를 따져보려 합니다.
1. 저성장은 정확히 무엇을 줄이는가
먼저 전제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저성장 시대라고 해서 복지 예산의 절대 규모가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2026년 9월 의결된 2026~2030년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총지출은 2026년 727조 9천억 원에서 2030년 1,005조 2천억 원으로 늘어납니다. 연평균 증가율이 8.4%에 이르고, 2027년 예산은 전년 대비 12.8% 증가한 820조 9천억 원으로 편성되었습니다. 국가채무는 2030년 1,734조 원 수준에 이를 전망입니다.
문제는 그 증가분의 성격입니다. 정부는 같은 계획에서 기초연금과 사회복지비용 등을 포함한 의무지출이 연평균 8.5% 늘어나 2030년에는 전체 지출의 최대 53.5%를 차지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동시에 국세수입 증가율은 반도체 호황 효과가 걷히는 2028년부터 3% 수준으로 낮아질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 계획 자체가 2030년까지 실질성장률 2%를 전제로 수립되었다는 점도 함께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시 전망은 더 냉정합니다. KDI는 2026년 잠재성장률을 1.6% 수준으로 추정했고, 2026년 2.5% 성장 이후 2027년에는 1.7% 수준으로 둔화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장기 시나리오 분석에서는 구조개혁이 지체될 경우 2040년대 초반에 역성장 구간에 진입할 가능성까지 거론됩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저성장이 줄이는 것은 복지 예산의 총액이 아니라 재량의 여지입니다. 파이 자체는 커지지만, 그 파이의 절반 이상이 이미 법률로 사용처가 정해진 상태로 태어납니다. 남은 절반을 두고 모든 신규 수요가 경쟁하게 되는 구조, 이것이 저성장이 복지국가에 만들어내는 실제 지형입니다.
2. '증분 배분의 종말'이라는 관점
여기서 제가 제안하고 싶은 관점은 증분 배분의 종말이라는 개념입니다. 예산학에서 아론 윌다브스키는 현실의 예산 과정이 원점에서 우선순위를 다시 짜는 합리적 설계가 아니라, 전년도 예산을 기정사실로 놓고 증가분만 협상하는 점증주의로 작동한다고 설명했습니다. 한국 복지국가의 확장기는 이 설명에 거의 그대로 들어맞습니다. 기존 급여는 건드리지 않고, 매년 늘어나는 세수로 새 제도를 얹거나 급여 수준을 올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방식의 정치적 미덕은 분명합니다. 누구에게서 빼앗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분배 원칙에 대한 합의 없이도 제도가 굴러간다는 점입니다. 고성장기에는 "누구에게 덜 줄 것인가"를 결정할 필요가 없고 "누구에게 더 줄 것인가"만 정하면 되므로, 원칙 논쟁이 무한정 유예될 수 있습니다. 한국이 기초연금의 성격이 부조인지 연금인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역할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를 12년간 미뤄둘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성장이 분배 원칙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이라고 봅니다. 저성장은 새로운 원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칙 없이 버텨왔다는 사실에 대한 청구서를 뒤늦게 내미는 것입니다. 파이가 커질 때 유예되었던 질문이 파이의 증가분이 이미 예약되어 있을 때 한꺼번에 돌아오는 것이지요.
3. 원칙 전환의 압력은 세 방향에서 옵니다
(1) 동일 급여에서 차등 급여로
가장 가시적인 변화는 기초연금에서 나타났습니다. 정부는 소득 하위 70% 노인에게 월 35만 원을 일률 지급하던 방식을, 소득 하위 30%·45%·70% 구간으로 나누어 차등 지급하는 구조로 개편하기로 했습니다. 하위 30%에 해당하는 348만 명은 3만 원이 오른 월 38만 원을 받고, 중간 구간은 물가 연동으로 9천 원 인상됩니다. 부부 수급자에게 일괄 적용되던 20% 감액은 하위 45% 이하 저소득 가구에 대해 10%로 축소됩니다. 기초연금 예산은 2026년 23조 1천억 원에서 2027년 25조 7천억 원으로 약 11% 늘어납니다.
주목할 점은 이것이 대상 축소가 아니라 급여 곡선의 조정이라는 사실입니다. 정부는 선정 기준을 '소득 하위 70%'에서 '기준중위소득'으로 바꾸는 방안을 검토했다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유보했습니다. 기준을 바꾸면 현 수급자 일부가 탈락하고 여러 사회보장제도의 연동 구조가 함께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즉 정부는 원칙을 바꾸되, 누구도 잃지 않는 범위에서만 바꾸는 경로를 택했습니다. 증분 배분의 논리가 차등화 국면에서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선택의 배경에는 2024년 기준 36%로 OECD 최고 수준인 노인빈곤율이 있습니다. 같은 돈으로 더 큰 빈곤 완화 효과를 내려면 급여를 평평하게 깔기보다 빈곤 집중도가 높은 구간에 기울여야 한다는 논리가, 재정 제약이 커질수록 설득력을 얻는 구조입니다.
(2) 수직적 재분배에서 수평적 재분배로의 무의식적 이동
두 번째 압력은 훨씬 덜 가시적이고,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저성장·고령화 국면에서는 의도하지 않은 수평적 재분배가 자동으로 확대됩니다. 사회보험은 노동에 연동된 부과 기반 위에 서 있는데, 부과 기반이 축소되는 동안 급여 지출은 인구구조에 따라 늘어납니다. 그 격차는 결국 현재 근로세대의 보험료율 인상이나 국고 지원 확대로 메워집니다.
이 이전은 어떤 분배 원칙에 근거해 선택된 것이 아니라, 제도 관성의 부산물로 발생합니다. 저소득층에서 고소득층으로 가는 이전이 아니라 젊은 세대에서 고령 세대로 가는 이전이라는 점에서 수직적 재분배와 성격이 다르고, 공개적으로 정당화된 적도 없습니다. 분배 원칙을 다시 논의해야 한다면, 가장 먼저 도마에 올려야 할 것은 기초연금의 급여 곡선이 아니라 아무도 합의한 적 없는 이 수평적 이전의 규모라고 생각합니다.
(3) 결과의 분배에서 위험의 분배로
세 번째는 분배 대상 자체를 다시 정의하는 방향입니다. 재정 여력이 넉넉할 때는 현금 총량을 넓게 뿌려 결과의 평준화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력이 좁아지면, 같은 재원으로 더 큰 효과를 내는 지점은 '평균적 소득 보전'이 아니라 위험 노출이 불균등하게 집중된 지점입니다. 질병·돌봄·실직이 결합해 한 번에 무너지는 가구와, 하나의 충격은 흡수할 수 있는 가구는 같은 소득 구간에 있어도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저성장기의 분배 원칙 전환은 '보편에서 선별로'가 아니라 '평균에서 취약 우선으로'가 되어야 합니다. 둘은 결과적으로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릅니다. 선별주의는 자격 없는 자를 걸러내는 데 행정 자원을 쓰고, 우선순위 원칙은 가장 취약한 지점을 찾아내는 데 행정 자원을 씁니다. 방향이 반대입니다.
4. 그러나 원칙을 바꾸는 데는 대가가 따릅니다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반론이 있습니다. 코르피와 팔메가 1998년 제시한 '재분배의 역설'입니다. 이들은 저소득층을 정밀하게 겨냥한 선별적 제도를 가진 나라일수록 오히려 재분배의 총량과 빈곤 감소 효과가 작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유는 정치적입니다. 중산층이 수혜자에서 빠지는 순간 제도를 지킬 유권자 연합이 무너지고, 결국 급여 수준 자체가 낮게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즉 "파이가 작아졌으니 가난한 사람에게 집중하자"는 직관은 단기적으로는 효율적이지만, 장기적으로는 파이를 더 작게 만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자산조사 확대에 따른 행정비용, 소득 파악의 한계, 수급 경계선에서 발생하는 절벽 효과, 낙인 문제가 더해집니다. 기초연금 개편 과정에서 정부가 선정 기준 변경을 유보한 것도 단순한 정치적 회피가 아니라, 이런 연쇄 효과를 무시하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5. 분배 원칙보다 조달 원칙이 먼저
그래서 제목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제 답은 조건부 예입니다. 분배 원칙은 바뀌어야 합니다. 다만 그 방향은 대상을 좁히는 선별화가 아니라, 위험 집중도에 따라 급여의 기울기를 조정하는 우선순위화여야 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저는 이 시리즈에서 복지 재정을 세입(조세)·사회보험료·재정지출의 세 축으로 나누어 보아왔는데, 저성장 국면의 논의는 유독 세 번째 축, 그중에서도 '누구에게 줄 것인가'에만 집중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배 원칙의 변경은 사실상 누군가의 기대를 축소하는 결정입니다. 이런 결정은 조달 측면의 설계가 소진되었음이 먼저 입증될 때에만 정당성을 얻습니다. 조세지출(비과세·감면) 구조를 재검토했는지, 사회보험료 부과 기반을 노동소득 바깥으로 확장하는 논의를 진지하게 했는지, 목적기금과 일반회계 사이의 칸막이가 효율을 떨어뜨리고 있지는 않은지를 먼저 따져야 합니다. 이 검토를 건너뛴 채 "파이가 작으니 원칙을 바꾸자"고 말하는 것은, 조달의 실패를 분배의 문제로 번역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저성장은 복지국가의 종말이 아닙니다. 다만 원칙 없이 증분만 나눠 온 시대의 종말이기는 합니다. 그 청구서를 어떻게 받아들 것인지가, 앞으로 몇 년간 한국 복지 논쟁의 실질적인 내용이 될 것입니다.
[참고자료]
- 2026~2030년 국가재정운용계획(2026년 9월 1일 국무회의 의결): 총지출 2026년 727.9조 원 → 2030년 1,005.2조 원(연평균 8.4% 증가), 2027년 예산 820.9조 원(전년 대비 12.8% 증가), 의무지출 연평균 8.5% 증가·2030년 비중 최대 53.5%, 국가채무 2030년 1,734조 원, 국세수입 증가율 2028년부터 3% 수준 추산, 2030년까지 실질성장률 2% 전제. (아주경제·파이낸셜뉴스 2026년 9월 1일 보도)
- KDI 경제전망 2026 상반기 및 2026년 2월 수정전망: 2026년 성장률 2.5%, 2027년 1.7% 전망. 2026년 잠재성장률 1.6% 수준 추정(기존 1.5%에서 상향). 기초연금과 지방교육교부금 등 의무지출의 효율화 필요성 제기
- 잠재성장률 장기 전망 보고서(국가정책연구포털 수록): 기준 시나리오에서 2040년대 후반, 구조개혁 지체 시 2040년대 초반 역성장 진입 가능성. 세입 기반 약화에 대응해 고성장·생산연령인구 다수 시기에 설계된 제도의 개편 필요성 지적
- 기초연금 개편안(2026년 9월 1일 발표): 소득 하위 70% 일률 월 35만 원 → 30%·45%·70% 구간별 차등 지급. 하위 30%(348만 명) 월 38만 원, 중간 구간 물가 연동 9천 원 인상, 부부감액 하위 45% 이하 20%→10% 축소, 직역연금 수급자·배우자 하위 45% 포함. 예산 23.1조 원 → 25.7조 원(약 11% 증가). 기준중위소득 기준 전환은 유보
- 노인빈곤 통계 및 전문가 논의: 2024년 기준 상대적 노인빈곤율 36%로 OECD 최고 수준. 국민연금연구원·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기초연금의 연금·부조 성격 혼재를 지적하며 저소득 노인 집중 지원 및 국민연금·기초생활보장과의 역할 재정립을 제언. 국회예산정책처는 급여 수준·대상·수급 연령에 따라 향후 10년간 수십조 원의 재정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고 분석
- 이론적 참고: Aaron Wildavsky의 점증주의 예산이론(The Politics of the Budgetary Process, 1964), Walter Korpi & Joakim Palme의 '재분배의 역설'(The Paradox of Redistribution and Strategies of Equality,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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