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단순한 이동이나 휴식이 아니라, 사회가 스스로를 비추어 보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여행을 통해 드러나는 계층·젠더·문화 코드는 한 사회의 권력 관계와 불평등 구조를 읽어낼 수 있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1. 여행을 ‘사회적 텍스트’로 읽기
여행과 관광은 특정 시대의 가치관·규범·권력 구조가 응축된 사회문화적 실천입니다. 누가 어디로, 어떤 방식으로, 어떤 이미지를 소비하며 여행하느냐는 계층·젠더·문화 자본의 차이를 반영합니다. 따라서 여행을 하나의 ‘사회적 텍스트’로 읽어내는 작업은 사회 구조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중요한 방법론이 됩니다.
본 글에서는 여행이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되는 방식을 계층, 젠더, 문화 코드라는 세 축으로 분석하고, 실제 여행 현장에서 이러한 코드들을 읽어내기 위한 구체적인 관찰·해석 방법을 논문 형식으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2. 이론적 배경: 계층·젠더·문화 코드의 교차성
2.1 계층과 여행: 누가 ‘이동할 수 있는가’
관광사회학 연구에서 계층은 여행 접근성과 경험의 질을 구조화하는 핵심 변수로 다루어져 왔습니다. 소득·직업·교육 수준은 여행 빈도, 이동 거리, 숙박 형태, 소비 패턴을 결정하며, 이는 다시 계층 간 라이프스타일 차이로 재생산됩니다. 예를 들어 실버층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여행 라이프스타일은 여가 시간, 경제력, 건강 상태 등 계층적 조건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이 분석된 바 있습니다.
'피에르 부르디외(Bourdieu)'의 문화자본 개념을 적용하면, 여행은 단지 돈이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장소를 선택하고 어떻게 경험할 줄 아는가’라는 취향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고급 예술·유산 관광을 선호하는 상류층과, 대중적 쇼핑·레저 중심의 패키지 관광을 선택하는 중·하류층 사이에는 상징적 경계가 형성됩니다.
2.2 젠더와 여행: 성별화된 이동과 경험
젠더 연구는 관광을 매우 성별화된 활동으로 규정하며, 관광 노동시장과 관광 경험 모두에서 성별 권력 관계가 작동함을 지적합니다. 키네어드(Kinnaird)와 홀(Hall) 등은 관광 경관, 관광 상품, 관광 노동이 젠더 규범 속에서 구성된다고 분석합니다. 예컨대 모험·스포츠 관광은 남성성(힘, 용기, 경쟁)을 상징하는 활동으로, 휴양·웰니스 관광은 여성성과 연계된 돌봄·치유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관광 일자리에서 여성은 감정노동·서비스·저임금 직무에 집중되고, 남성은 관리·기술·고임금 직무에 배치되는 젠더 분업 구조가 보고되어 왔습니다. 이는 관광이 젠더 평등을 촉진하는 동시에, 기존의 위계와 차별을 재생산할 위험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3 문화 코드: 관광지에 각인된 상징 구조
관광은 특정 장소와 문화를 ‘볼거리’로 재구성하는 과정이며, 이때 다양한 문화 코드가 동원됩니다. 지역의 역사·민속·자연 자원은 관광 콘텐츠로 기획되는 과정에서 성별, 계층, 민족, 세대 등의 관점에서 선택·배제의 과정을 겪습니다. 예를 들어 제주 지역의 관광 정책을 젠더 관점에서 분석한 연구는, 여성 역사·돌봄 노동·젠더 폭력 문제가 관광 콘텐츠에서 쉽게 지워지는 경향을 지적합니다.
문화예술·관광 정책 전반에서도 특정 계층과 성별의 경험이 ‘보편적 문화’로 포장되는 반면, 다른 집단의 경험은 주변화되는 구조가 지적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관광지의 상징 구조와 스토리텔링 속에 각인되어, 방문객의 인식과 감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3. 여행에서 계층 읽기: 선택·접근성·표상
3.1 여행 행선지와 상품 선택
계층 코드는 우선 여행지가 어떻게 계층적으로 구분되는지에서 드러납니다. 고소득층은 장기 해외여행, 미술 비엔날레, 와이너리 투어, 고급 리조트 등 높은 비용과 문화자본을 요구하는 목적지를 선택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반면, 중·저소득층은 단기·근거리 여행, 패키지 투어, 할인 항공권과 대형 여행사의 표준화된 코스를 활용하는 비율이 높게 나타납니다.
여행이 ‘힐링’과 ‘자기계발’의 수단으로 강조될수록, 이를 실천할 시간과 비용을 가진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 사이의 격차는 더 뚜렷해집니다. 블로그·SNS에서 재현되는 여행 이미지는 종종 상대적으로 특권화된 계층의 라이프스타일을 ‘일반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효과를 가지기도 합니다.
3.2 이동과 접근성의 불평등
교통수단, 숙박시설, 관광 인프라에 대한 접근성 또한 계층 코드를 드러냅니다. 저가 항공, 게스트하우스, 캡슐 호텔, 야영장 등은 비용 부담을 낮추지만, 서비스 품질과 안전, 노동조건의 측면에서 불평등을 수반할 수 있습니다. 반면 고급 리조트·프라이빗 투어·비즈니스석 항공 이용은 공간적·심리적 거리를 통해 다른 계층과의 분리를 강화합니다.
실버층을 비롯한 취약 계층에게는 물리적 이동성, 건강, 정보 접근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여행 기회가 구조적으로 제한된다는 연구 결과도 제시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여행은 ‘누가 언제 어디로 이동할 수 있는가’라는 이동권의 문제로 확장해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3.3 여행 이미지 속 계층 표상
관광 홍보물과 미디어 콘텐츠에서 묘사되는 여행자의 모습 또한 계층화된 이상형을 재현합니다. 고급 호텔과 미슐랭 레스토랑, 고가 액티비티를 자연스럽게 소비하는 이미지는 중산층 이상을 표준화된 소비 주체로 상정합니다. 반면, 이주노동자·지역 저소득층·노년층·장애인은 관광 이미지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거나, ‘도와줘야 할 대상’으로 주변화됩니다.
이러한 표상 구조는 특정 계층의 라이프스타일을 ‘정상’으로, 나머지를 ‘예외’로 만드는 상징 폭력으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여행 콘텐츠를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등장인물 구성, 소비 수준, 배경 공간 선택을 통해 어떤 계층을 가시화·비가시화하고 있는지 점검하는 비판적 시각이 요구됩니다.
4. 여행에서 젠더 읽기: 역할·노동·몸의 규범
4.1 성별에 따른 여행 경험의 차이
젠더 연구는 동일한 관광지라도 여성과 남성이 서로 다르게 경험하고 인식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여성 여행자는 안전, 성희롱, 감시의 시선 등과 관련된 불안을 더 크게 느끼는 반면, 남성 여행자는 자유, 모험, 자율성의 감정을 더 강조하는 경향이 보고되었습니다. 이는 야간 이동, 혼자 여행, 특정 국가·도시 선택에서 젠더별로 상이한 패턴을 형성합니다.
또한 ‘우정 여행’, ‘가족 여행’, ‘커플 여행’ 등 관계 유형에 따라 여성에게 기대되는 감정노동과 돌봄의 강도도 달라집니다. 여행 계획·예약·짐 챙기기·사진 촬영·감정 조율 등의 보이지 않는 노동이 여성에게 집중되는 사례는 일상과 여행 모두에서 반복되는 젠더 분업 구조를 보여줍니다.
4.2 관광 노동시장의 젠더 위계
관광 산업 내 노동은 젠더 위계와 교차하는 계층·인종·국적의 구조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여성은 리셉션, 객실 정비, 식음 서비스, 엔터테인먼트 등 감정노동과 미적 기준이 강조되는 직무에 집중되는 반면, 남성은 관리직, 셰프, 기술·안전 관리 등 권력과 권위가 부여되는 직무에 배치되는 경향이 보고되어 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는 성희롱·성폭력, 임금격차, 승진 차별에 더 취약한 위치에 놓입니다. 문화예술·관광 분야 성평등 실태 조사에서도 남성 중심적 권력 구조, 성별 임금격차, 외모 강조·성적 대상화 등이 주요 문제로 지적됩니다. 이는 관광이 젠더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중요한 장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4.3 여행 이미지와 몸의 젠더 규범
관광 마케팅과 여행 콘텐츠는 종종 특정 젠더 규범을 이상화된 이미지로 제시합니다. 여성은 젊고 날씬하며 ‘인스타그래머블’한 몸을 가진 존재로 표현되고, 남성은 활동적이고 주도적인 모험가의 이미지로 재현되는 사례가 많습니다. 이는 패션·외모·포즈·소비 방식에 대한 강력한 규범을 형성하며, 다른 몸과 젠더 정체성을 배제하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현대 패션과 젠더 가치관 연구에서도 젠더 규범은 개인 정체성과 소비 스타일에 깊게 내면화되어 있음을 보여주며, 이는 여행 패션·사진 연출·공유 방식에도 반영됩니다. 여행을 기록하는 사진·영상 속에서 누가 카메라 앞에 서고 누가 뒤에 서는지도 젠더 권력 관계를 읽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5. 여행에서 문화 코드 읽기: 기억·정체성·정책
5.1 관광지 스토리텔링과 선택적 기억
관광지는 특정 역사와 문화를 선택적으로 부각하고, 다른 부분을 삭제·축소하는 서사 구조를 통해 구성됩니다. 제주 관광 콘텐츠의 젠더 영향 평가 연구에서, 지역 역사와 관광지 스토리텔링이 남성 중심 서사에 편중되고 여성의 노동·저항·돌봄의 역사는 배제되는 경향이 지적된 바 있습니다. 이는 관광이 지역 사회의 기억과 정체성을 어떻게 재구성하는지 보여줍니다.
또한 식민 경험, 전쟁, 이주, 환경 파괴 등 불편한 과거는 ‘힐링’과 ‘낭만’의 이미지 뒤로 숨겨지기 쉽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관광 상품으로 기획되고, 어떤 이야기가 침묵되는지 분석하는 것은 문화 권력 구조를 읽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5.2 정책과 제도 속 문화 코드
문화·관광 정책은 표면적으로는 성평등·포용·지역 균형을 지향하지만 실제 집행 과정에서 다양한 한계를 드러냅니다. 문화예술 분야 성평등 정책 연구는 성평등 담론이 확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장의 성불평등(성별 직무분리, 임금격차, 남성 중심 권력 구조)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제도적 차원의 성평등과 실제 경험 사이의 간극을 드러냅니다.
제주 지역의 관광 정책 젠더 평가 또한 성인지 관점이 일부 반영되었으나, 실제 콘텐츠 개발과 관광지 운영에서 여성·소수자 경험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따라서 여행자는 관광 안내문·해설·전시 구성·축제 프로그램 등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정책과 제도 속에 내재된 문화 코드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5.3 교차성의 관점: 계층·젠더·문화의 중첩
최근 논의는 계층, 젠더, 민족, 국적, 장애, 나이 등 다양한 사회 범주가 교차하며 지배와 배제의 구조를 형성한다는 교차성 이론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관광 연구에서도 국적·인종·성별·계급이 중첩된 위치에서 여성 노동자·성소수자·이주민이 겪는 차별과 폭력을 분석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교차성의 관점에서 여행을 바라볼 때, ‘여성 관광객’이나 ‘실버 여행자’ 같은 단일 범주만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복합적 불평등 구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여행 콘텐츠를 제작하고 관광 정책을 기획하는 과정에서도 필수적인 분석 틀이 됩니다.
6. 여행에서 계층·젠더·문화 코드를 읽는 실천적 방법
6.1 관찰의 질문 리스트
실제 여행 현장에서 사회적 코드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질문을 던지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이 공간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여행자는 어떤 계층·성별·연령·국적을 가진 사람들인가.
- 안내문과 홍보물에 등장하는 인물·언어·이미지는 누구를 중심에 놓고 있는가.
- 관광 노동자는 어떤 사람들인가, 성별·국적·계층에 따라 맡는 역할이 어떻게 다른가.
- 어떤 역사와 이야기가 강조되고, 무엇이 말해지지 않는가.
- 나의 여행 스타일과 콘텐츠는 어떤 계층·젠더·문화 자본을 전제하고 있는가.
이와 같은 질문은 여행 경험을 단순 소비에서 사회 비판적 읽기로 전환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6.2 콘텐츠 제작자·기획자를 위한 제언
여행 블로거, 인플루언서, 관광 기획자, 정책 담당자는 사회적 코드에 민감한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실천이 제안될 수 있습니다.
- 다양한 계층·젠더·세대·국적의 주체를 등장시키는 서사 구성.
- 여성·소수자의 경험과 목소리를 관광 스토리텔링에 반영하기.
- 과도한 소비와 사치 이미지를 ‘보편적 여행’으로 제시하지 않기.
- 지역 주민의 노동과 돌봄, 환경 문제를 가시화하는 리포팅 강화.
- 성평등·인권·환경 기준을 고려한 여행 상품·콘텐츠 선정.
이러한 노력은 여행을 보다 정의롭고 포용적인 사회 실천으로 전환하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도움 글·연구 출처]
- Kinnaird, V. & Hall, D. “관광은 고도로 젠더화된 활동이다” 등 젠더와 관광 연구 흐름 정리
- 관광 노동시장의 젠더 위계와 성희롱·임금격차 등을 분석한 “관광 노동의 젠더 차원”
- 실버층의 관광 라이프스타일과 태도·만족도를 다룬 국내 연구
- 제주특별자치도 관광 콘텐츠에 대한 특정 성별 영향 평가 보고서
- 문화예술 분야 성평등 지원 정책의 방향과 현황을 분석한 연구
- 현대 패션과 젠더 가치관 변화를 통해 젠더 규범의 내면화를 논의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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